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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Chapter 12. 남한산성 > 축성의 백과사전, 시대상 반영한 축성술이 고스란히

♣ 축성의 백과사전, 시대상 반영한 축성술이 고스란히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축성의 백과사전, 시대상 반영한 축성술이 고스란히
▲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나레이션 나레이션

1. 천혜의 요새: 산 위에 세워진 비상 수도 남한산성은 해발 480m의 험준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고, 그 안쪽에는 만 명 이상의 병력과 백성이 상주할 수 있는 넓은 분지를 갖춘 '산 위의 계획도시'입니다. 특히 풍부한 수량은 장기 항전을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과 후금(청)의 위협에 대응하여 본격적으로 개축된 남한산성은 본성과 3개의 외성을 포함해 총 12.3km에 달하는 거대 방어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2. 4개의 대문과 16개의 암문(暗門) 남한산성의 성문은 산세에 맞추어 배치되었습니다. 당당한 문루를 갖춘 4대문 외에도, 적 모르게 물자를 운반하거나 기습 부대를 내보내기 위한 16개의 암문이 설치되었습니다.

  1. 북문(전승문): 병자호란 당시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전멸한 패배의 장소였으나, 훗날 정조는 패배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2. 남문: 인조가 성으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가장 크고 위엄 있는 정문입니다.
  3. 서문: 청나라에 항복하러 나갈 때 이용한 낮고 좁은 문으로, 왕의 굴욕을 상징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3.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비극 1636년 12월, 청의 대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인조와 1만 3천 군사는 혹한과 식량 부족 속에서 47일간 버텼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함락 소식과 참패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겪었습니다. 이후 수십만 명의 백성이 인질로 끌려가는 등 조선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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