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해인사 장경판전 > 풀리지 않는 신비, 보존과학의 극치♣ 풀리지 않는 신비, 보존과학의 극치
나레이션고려는 불교를 나라의 바탕 이념으로 삼은 국가이다. 왕조를 일으킨 태조 왕건이 유언으로 남긴 **《훈요십초(訓要十條)》**만 보더라도, 그 첫 번째 항목이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하므로”로 시작할 정도이다.
470여 년의 고려 역사를 놓고 볼 때 가장 큰 국난은 몽골의 침입이었다. 1235년 몽골이 세 번째 침입을 하자, 당시 최고 권력자 **최우(崔瑀)**는 군사들과 함께 맞서 싸웠다. 하지만 몽골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최우는 흐트러진 민심을 모으고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대장경 간행이라는 거국적인 프로젝트를 결심했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의 총집결체로, 이를 제작하여 보관하면 부처의 가호를 받아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고려는 1010년 거란의 침입 때 **《초조대장경》**을 제작하여 적을 물리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군에 의해 불타 버리고 말았다.
1236년, 최우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조판 작업을 시작했다. 목수, 각공, 서생, 승려 등 수많은 이들이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메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글자를 새겨 나갔다. 착수한 지 16년 만인 1251년, 드디어 대장경 조판을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 **《고려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을 다시 판각했다 하여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8만여 매의 목판 양면에 5,230만여 자를 새긴 이 방대한 기록물은 한문을 잘 아는 사람도 30년을 읽어야 할 만큼 엄청난 분량이다. 강화도에서 시작된 이 대장경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져 지금까지 그 위용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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